검색결과
-
무세중과 전위예술(5) <BR> '巫世衆 춤 이야기'에 붙여安柄變/ 영화평론가 巫世衆은 이 時代의 奇人이다. 現代는 奇人의 특가 아니다. 모두가 자그마한 規格品의 통조림처럼 인간들은 규격화되고 왜소해지고 어느 통조림하다 독특한 맛을 내지 못하고 있다. 이런 획일주의가 풍미하여 전제적 유치자들이 인간을 획일화 시켜서 그런지,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이 악순환 속에서 모두는 찌들게 획일화되었고 왜소화 되어 個性을 잃은 채 흘러가고 있다 그러나 巫世衆은 그렇지 않다. 巫世衆, 사실 그는 筆者와 함께 다니던 高校時節에는 金世中이 있다. 熱血青年이었고 웅변반 반장이었던 美少年이었다. 그에게서 그 時節 발견할 수 있었던 것 은 規格化와 優等生을 강요하면 名門高의 툴로부터 탈출하려고 했던 순수한 情熱이었다. 서울대학 入學만이 最大의 目標였던 그 高校時節의 분위기 속에서 그는 超然했고 그런 世俗的 노력은 아랑곳하지 않는 傲慢(?)이 있었던 것이다. 그 오만이 그로 하여금 姓氏까지 바꾸게 하고 오늘의 巫世衆을 있게 만든 原動力이 된 것이다. 巫世衆은 그의 作業 자체가 그렇지만 친우인 내게 있어서는 매우 兩面的인 즉 앰비발런트한 감정으로 30年을 함께 지내왔다. 그가 추구하는 民, 民眾, 巫, 反外勢, 統일 등의 관심은 줄기차게 그의 특징을 이뤄주고 있다. 필자가 그러나 엠비발렌트하게 느끼는 것은 그의 發想이나, 主題追求의 大原則이 그深奧(?)한 思想의 根底를 늘 이해하게 하며 이 時代 그리고 아프게 겪어야 했던 지난 30年間의 세월 속에서 너무나 당연한 主唱이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누군가가 꼭 외쳐야 하는 時代的絶叫였다. 그러나 내게 있어 엠비발렌트한 것은 그의 作業에 있어 들어나는 生硬함과 混亂과 主張이 表面에 지나치게 强力하게 앞서나와 있다는 점에서 오는 困惑感이었다. 形式美가 아쉬웠다는 점이다. 이런 사실로 인해 筆者는 國內에서 巫世衆의 公演은 하나도 빼놓지 않고 관람하고 또 함께 술을 마시고 때로는 이른바 쫑파티도 참여하여 그를 격려하기 보다 오히려 질책에 가까운 나무람으로 例의 엠비발렌트한 감정을 토로하곤 했던 것이다. 그가 독일에서 귀국하여 '통·막·살'을 보여주고 종이 文明과 偽善에 찬 온갖 虛勢 外勢에 대해 공격의 화살을 쏘아 붓고 原爆被害 한국인의 슬픔을 告發하던 패기와 분노가 다시 차분히 가라앉으며 (上下左右)를 주제로 한 '무세중 춤이야기'를 엮어 作・演出・按舞・出演의 퍼포먼스를 펼치게 된 것은 그를 계속하여 지켜보아 온 그의 관객으로서 기대되는 바가 컸다 아니할 수 없다. 그 기대는 그가 30年 걸어온 年輪에 대한 自己反省의 뜻이었으며 앞으로의 30年을 향해 나갈 새로운 도약과 도전의 面貌가 기대되었다. 巫世隶은 인간적인 면에 있어 그 表面에 나타난 강인함과 힘찬 열정속에 늘 순수하고 여린 감성을 간직하고 있다. 그가 독일에서 귀국했을 때 그는 술자리에서 자꾸 눈물을 흘리었다. 이 여리고 순수한 감정은 현대 인간이 잃어가고 있는 마음의 고향에 대한 향수같은 것이었다. 그는 또한 누구보다도 인간을 사랑하는 현대에 몇 남지 않은 奇人 중의 한 사람이다. 특히 아내 이나미에 대한 현신적인 사랑과 보살핌 그리고 그 둘이 어울려 보여주는 그의 작품세계는 참으로 조화롭고 아름답다. 이들은 '굿누리'에서 함께 고생하며 삶을 따뜻한 체온으로 녹여갔다. 그리고 뉴욕에서 함께 공연하며 우리의 전위예술을 널리 알리었다. 巫世隶이 이제 뜻있는 이들의 도움으로 '蘇塗'라는 연구소도 차리고, 또 의정부에서 민족통일을 위한 초석을 다지기 시작한 지금 그가 줄기차게 추구한 反外勢統一에 대한 남다른 집념 그리고 늘 그가 함께 하는 民衆은 참으로 귀한 집념이며 그는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몇 남지 않은 우리 민족의 귀한 존재임을 일깨워주고 있다. 巫世衆은 奇人이다. 이 時代에는 이런 奇人이 한명쯤 있어야 한다. 사실 2~3名은 더 있어도 좋다. 그 奇人의 傲慢과 熱情과 분노가 이 따분하고 物的이고 妥協的이고 눈치 보기에 바쁘고 利害에 따라 離合集散하는 非藝術的 물흐름 속에서 외치고, 소리지르고, 뒹굴고 그리고 분노하는 몸부림의 모습으로 우리들에게 새로운 자극을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巫世家이여! 언제나 깨어 있으라. 우리는 그대를 지켜 보리라.
-
무세중과 전위예술(4) <BR>巫世衆- 그의 명인(嗚咽)과 몸부림 통일을 위한 <br> '反 그리고 통·막·살'(2편)무세중씨는 그의 예술적 입장이 쉬르리얼리스트임을 자처하고 있다. 일찌기 쉬르리얼리즘을 무대에서 확인한 사람은 詩人 기욤 아폴리네르였다. 1917년에 공연된 장 꼭도의 '빠라드'와 아 폴리네르의 타이레시아스의 젖가슴 공연에서 超現實主義 演劇이라는 말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쉬르리얼리즘 演劇이 처음으로 공연되기 1년 전인 1916년 4월, 취리히에서는 트리 스탄츠아라, 한스 아르프, 리챠드 홀젠벡크 등 세 사람이 詩人, 그리고 畵家들과 超現實主義藝 術運動의 母胎가 되는 dada演劇을 공연한 적이 있다. 이 일이 있은 후 1918년 츠아라는 그의 유명한 Dada宣言文을 발표하게 된다. 그 宣言文의 내용을 간추려보면 무세중 연극의 근거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Dada는 사회적 계급의 타파이다. Dada는 충돌의 美學이다. Dada 는 未來의 추방이다. Dada는 본능적이며 자연발생적인 모든 점을 절대적으로 믿는다.' 이들은 이같이 宣言하고 反藝術,反理性,反思想의 깃발을 내걸었다. 다다이스트들(The Dadaists)은 한스 아르프가 주장한대로 '미쳐버린 時代'의 소산이다. 그래서 藝術家들은 근원적인 개혁과 변화를 요구하게 되었고, 이같은 요구를 관철하기 위한 전략으로 '人類의 苦惱를 슬퍼하고 憤怒하는 일'에 헌신하게 된다. 다다이스트들은 이 일을 하는 과정에서 그로테스크 심볼리즘 (grotesque symbolism)의 美學을 발전시켜 나갔다. 이 일이 진행되는 동안 앙드레 브루통, 루이 아라공, 필립 스포가 새로운 超現實主義運動을 전개해 나갔다는데 아라공이 한 말은 무세중씨와의 관련에서 중요하다. '우리들은 여러분들에게 친근한 이 매우 편리해야 하고 어리브드의 이 무며 소에 마치 혈암(頁巖) 속에 갇힌 화석마냥 사로잡혀 있다. 서구世界 속에서 여러분들은 사형선고를 받았다. 우리들은 서구의 맞춤들인 것이다... 여러분들의 공포의 대상인 東洋이 우리들의 목소리에 답할 것이다. 여러분들의 공부르타일리스트와 다다이스트들이 하고자 했던 알파한 것이고통 마살에서 실천해 보였다. 반의 빛을 내 건것이 그러했고 쏘의 타부를 타파한 것이 그러했고, 이 時代 를 개혁하려는 의지가 그러했고, 歷史의 비극과 인간의 무력함을 슬퍼하고 분노하며 크로테스크 심볼리즘에 의지하는 일이 그러했으며, 혼란과 불안의 충격적인 조성이 그러했고, 각성의식의 商가 그러했다. 이같은 일이 가능했던 것은 그의 歷史습들이 투철했기 때문이며 社會的反抗性이 확고했기 때문이다. 그의 소해 레퍼터리였던 '역사의 후회', '말하는 벙어리', '종이전쟁', '왜 삽니까' 등에서 이같은 特性은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다. 무세중씨는 아르또의 해학을 올바르게 수용하고 있다. 그는 肉體言語의 효과적인 創造를 통해 꿈들로 얼룩진 시의 內面的 어둠과의 접촉을 시도했다. 아르또의 행은 강렬성을 의 미한다. 그는 동작, 음악, 고함소리, 신음소리, 울음소리, 웃음소리, 음향효과, 그리고 스펙타클 을 통해 드라마의 강렬성을 관객으로 하여금 체험케 했다. 아르또는 그의 宣言文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우리들은 무대와 객석의 구분을 없애 고 배우와 관객의 공통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연극적 액션의 중심에 관객들을 참여케 함으로써 관객과 공연사이의 장벽을 철폐한다. 무세중씨는 이번 소회을 통해 드라마를 쓰는 사람과 드라 마를 행하는 사람의 구분을 어떻게 없앨 수 있는가 하는 측면의 實驗을 시도했다. 관객 모두가 쌀부대를 뒤집어 쓴다든가, 극장 무대에 들어서면 입구에 누워있는 배우의 몸을 건너가게 한다 든가, 관객들이 무대 위에서 배우들과 공존하면서 관객들이 무대 속으로 뛰어들게 한다든가, 공연현장을 돌아다니며 본다든가 하는 시도를 통해 관객은 연극적 액션의 중심에 어느 정도까지 접근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을 실험해 보였다. '곡의 소리'에서 배우들이 관객들 한 사람 한 사람 면 전에 접근해서 관객들의 손을 잡으며 이들의 슬픔에 동참해 줄것을 종용한다든가, '종이 전쟁'에 서 관객이 종이 인간을 향해 종이 뭉치를 던지면서 야유를 퍼붓게 하고, 종이인간을 찢고, 종이 에 불을 당기도록 하는 일등이 이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공연 중간 중간 인터밋션 때 관객들의 合唱을 선도하는 노래도 이 일에 기여하는 책략이라고 할 수 있다. 아르또는 1933년 4월 6일 소르본느에서 演劇 강연을 했을 때 "나는 관객들에게 가혹한 질병 의 체험을 주고 싶다. 그래야만 그들은 공포 속에서 각성하고 깨어날 수 있다. 나는 그들을 각성 시키고 싶다. 그들은 그들이 죽어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죽음은 귀가 멀고 눈이 먼 것처럼 완벽하다. 이것이 내가 표현하려는 꿈인 것이다. 나는 탄생의 투쟁을 그리고 싶다." 무세중씨의 작품 '아편', '나는 개가 되고 싶다'는 육체와 인간의 목소리를 통해 인간 체 힘의 극한 상황을 표현하고 있다. 죽는다는 사실은 무엇인가, 동물이 된다는 사실은 무엇인가. 인간은 어느정도 병들고 있는 것인가. 이같은 죽음 속에서 탄생을 위한 투쟁은 어떻게 가능한 것 인가 하는 문제들을 집중적으로 추구하고 있는데, 이는 지극히 아르또적인 발상이라 할 수 있다. 비웃고 헐뜯고, 헐뜯고 비웃는 행위를 보여줌으로써 관객이 해방되어, 정신의 淨化을 성취할 수 있도록 만든 이 공연은 演劇의 이론을 탁월하게 무대에 실천한 공연이 되게 만들었다. 쫓는 그가 살아가는 일에 대해 어떤 해답을 지니고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고 죠셉 체이킨은 말한 적이 있다. 배는 그가 체험한 일에 말없이 의문을 던지면서 무대에 서고, 그가 하는 작업 과정을 통해서 그 자신을 재창조한다. 무세중씨가 이번 공연을 통해서 이룩한 빛나는 성과는 그가 쉬르리얼리즘의 演劇을 시도했다. 거나, 아르또의 殘酷演劇論을 무대에 실천했다는 데에도 있지만, 더욱더 큰 수확은 군대 현대연 극의 理論的 모태가 된 이 두 演劇潮流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우리나라의 과 의 연회 전통을 의식하고 그 표현수단에 크게 의지했다는 데 있다. '한의 소리', '곡의 소리', '통·막· 살 등은 이 점을 명확히 해준 공연이었다. 특히 南北의 장벽이 힐리는 감동적인 순간을 한 통·막 살은 그 祭儀性이나, 空間構成이나, 권인 음악과 소리에 있어서는 소도구 및 대 도구면이나, 동작과 춤에 있어서나, 그리고 액션에 있어서 序幕 부분에서 발휘된 쉬르리얼리즘 과 아르또가 우리의 巫俗과 民俗 속에서 하나로 융화되는 강렬한 무대를 창출해 내었다. 무대 한복판에 흰 광목이 팽팽하게 우뚝 쳐져 南北을 가로막고 있는 '통·막·살' 무대에서 무 세중씨는 거의 알몸이 되어 막걸리 통속에 들어가 몸을 씻고, 황토 진흙과 시래기로 온 몸을 바른 후, 광목벽을 향해 몸을 부딪히고, 머리로 박고, 이로 물어뜯고, 손톱으로 후비며 몸부림친 다. 광목벽 북쪽에 자리잡고 있던 화가 金丘林씨는 붓으로 그의 몸이 닿는 곳에 색을 칠한다. 무세중씨가 광목벽에서 몸을 때면 그의 몸이 닿았던 흰 광목벽에는 그의 苦惱가 피빛이 되어 찍혀 있다. 이 동작을 여러번 반복하고 난 다음 그가 흰 광목벽을 찢는 순간, 그는 찢어진 틈새에 몸을 걸치고 오열한다. 그리고 난 다음 그는 북으로 건너가 북쪽에 서있는 金丘林씨를 끌어안는다. 두 사람은 얼싸안고 운다. 다시 돌아서서 흰 광목벽을 완전히 제거하는 순간 朴倫初씨는 분단의 비극 때문에 희생당한 원혼을 달래는 진혼가를 판소리로 애달프게 부른다. 북소리, 징소리, 배우들의 통곡소리, 관객들의 뜨거운 눈물 속에서 統一을 위한 이 살풀이는 끝난다. 무세중씨는 한 사람의 배우로서 이 나라의 歷史 社會와 그리고 分斷의 비극에 대해서 깊은 의문을 던지며 이 무대에 발을 붙이고 섰다. 그는 무대행위 속에서 그 자신도 예상치 못한 어떤 변용이 이룩되었다. 이 변용 속에서 그는 자의 재창조가 가능해진 것이다. 그의 재창조 과정은 무대 전체에 파급되었다. 배우들을 변용시키고, 관객들을 변용시킨 것이다. 그의 '反, 그리고 통·막·살은 우리 모두가 체험한 歷史 속의 죽음에 대한 인식이었고, 죽음의 恨을 달래는 鎮魂曲이었고, 새로운 탄생을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로토흐스키의 명언은 이런 공연에 해당될 수 있을 것이다. "俳優는 자기의 全存在를 기증한다. 그것은 '황홀(恍惚)'의 기술이다. 이 때 俳優의 肉體와 本質의 深部에서 일종의 '透視光線'이 분출한다." 우리는 俳優의 빛이 歷史의 빛이 되는 이 무대에서 우리 자신이 무자비하게 폭로되는 공포를 느꼈다. 1982년 이태주
-
무세중과 전위예술(3) <BR>巫世衆-그의 명인(嗚咽)과 몸부림 통일을 위한 <br>'통·막·살'(1편)國際演劇學會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지난 9월 독일에 갔을 때, 西베를린에서 무세중씨를 만났다. 5년전 블루진 차림으로 특색을 짊어지고 독일 간다고 德成女大 내 研究室을 찾아왔을 때 나 는 그가 왜 떠나며, 가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떠나는 순간까지 그가 깊은 몸 암동에 있었기 때문에 아침 저녁으로 오가는 길에 그의 집에 자주 들렀고, 들을 때마다 술잔을 물의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 집이 그때 정릉이요, 그의 집이 돈 나누며 허물없이 무엇이든 의논하고, 서로간에 깊은 얘기를 나누었다. 그의 多血質 성격과 비타 협적인 정신과 옹고집 때문에 그는 언제나 울분에 가득차 있었다. 그 울분은 우리 演劇이 改革 되어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현황때문에 폭발하는 것이었다. 「한극회」를 만들어 演劇改革 심포 지움을 개최했을 때 그는 몸을 던져 일을 했다. 演劇學會를 창립할 때에도 그는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 모든 일이 우리 연극을 새롭게 하는 일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일찍부터 연극에 미쳤고, 탈에 심취했고, 탈춤에 빠졌으며, 周易공부에도 열을 올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집은 그가 무엇에 얼마나 미쳐 있었는가를 알려주는 조그마한 演劇博物館이었다. 공부할만한 것이면 무엇이든 수집했다. 경청할만한 것이면 무엇이든지 메모해 두고 녹음해 두었다. 불만한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카메라에 담아 두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집어다 놓아야 직성이 풀리는 그런 경지였다. 앞으로 얼마나 살려고, 또 얼마나 큰일을 하려고 이토록 법석을 떨며 수집하고, 카드를 작성하고, 노트에 열을 올리는지 나는 언제나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었다. 이 모든 일은 그가 얼마나 진지하게 열심히 살아왔느냐 하는 것을 말해준다. 그가 얼마나 용감하게 이리뛰고 저리뛰며 살았는가를 말해준다. 그러나 세상은 그의 의욕과 정열을 이해해 주지 않았다. 그는 갑자기 벽에 부딪힌 것이다. 그는 그의 生과 예술의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歐美演 劇을 배우고, 歐美演劇의 최첨단과 부딪쳐 보자는 생각이 그에게 떠올랐다. 그는 떠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그는 가난했다. 꽃이 만발한 德成女大 캠퍼스에서 나와 작별의 굳은 악수를 나누고 그의 등을 쓰다듬어 주었을 때, 내 말문이 막힌 것은 그가 가는 길이 얼마나 험악한 길인가를 나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불안했다. 그러나 한가지 희망을 걸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호주머니는 비어 있었지만 우리의 巫俗과 民俗의 귀중한 봇짐을 힘껏 짊어지고 간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맨손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東洋의 하늘을 담고 가는 것이었다. 나의 불안을 해소해 준 유일한 위로는 이것뿐이었다. 그와 헤어진지 일년 쯤 지났을 때 나는 學會일로 서독 뮌헨에 갈 일이 생겼다. 그에게 연락해서 뮌헨에서 만나자고 했다. 그는 바람처럼 회의장에 나타났는데 예상한 대로 얼굴은 헬쓱하고 창백해져 있었고, 과로와 영양실조로 고생한 흔적이 역연해 보였다. 온 몸이 쑤시고 아프다며 특히 허리에 통증을 느낀다고 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탄산수를 사 마실 돈이 없어서, 마셔서는 안 되는 물을 마구 퍼마셨기 때문에 생긴 腸結石이 원인이었는데 치료비도 없고 해서 맥주를 마시며 結石을 씻어내렸다는 것이다.)그는 일정한 주거지도 없이 유럽 땅을 방랑하고 있었다. 오갈데가 없으면 무조건 전위극단을 찾아가서 탈춤을 가르쳐 주고 며칠씩 신세지곤 했다. 유럽 땅에 황혼이 깃들면 극심한 고독과 가난 때문에 매일 죽고만 싶은 심정이라고 말하면서 그는 뮌헨을 떠나갔다. 귀국 후, 그로부터 간간이 편지가 날아왔다. 미국에도 가고, 유럽 땅을 돌아다니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탈춤을 보여주고 가르치면서 생활해가고 있다고 말했다. 죽을 힘을 다해서 공부를 부지런히 하고 있다고도 말했다. 그리고는 말끝마다 자기를 잊지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그의 편지를 받아들면 언제나 눈물이 글썽해졌다. "죽일놈 돌아올 것이지." 그가 떠난 후 아이러니컬 하게도 우리나라에는 탈춤 붐이 일기 시작해서 이 곳에도 그가 할 일이 태산 같은데 어서 와서 그 일을 할 것이지. 나는 혼잣말로 중얼대곤 했다. 그러나 그는 고집스럽게 버티어 나갔다. 3년이 지난 후, 그는 유랑생활에 매듭을 짓고 西베를린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서베를린은 前衛藝術의 중심지이고, 그와 같은 유랑 藝術家들이 집결해 있는 곳이어서 그가 활동하기에는 이상적인 도시였을 것이다. 처음에 그는 그곳에서도 유명한 연극연구소(춤 중심의)에서 그가 새 로 연구한 '타이치'라는 춤을 가르치는 강사직을 맡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그의 춤을 출수있는 제자들을 양성했다. 이들 제자들을 거느리고 작품 발표회를 가졌다. 물론 처음에는 묵살당했다. 그러나 굴복하지 않고 꾸준히 그는 작품 발표회를 연달아 가졌다. 몰이해와 무관심으로 뒤범벅 된 1년간의 시련의 세월이 흐르자 베를린 前衛藝術界는 그의 작업에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했 다. 신문, 잡지와 텔리비젼에서 그의 공연을 예고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뛰어난 예술가들이 그의 공연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는 오프-베를린의 화제가 되기 시작했고 그의 공연 예고는 신문, 잡지의 톱을 장식하게 되었다. 그의 공연을 격찬하는 비평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한동안 소식이 끊겼다가 작년 9월 베를린에서 그를 만났을 때 첫째로 놀란 것은 빨간 小型自動車를 직접 몰고 왔다는 사실이었고, 둘째는 그가 安住하는 집이 있었다는 사실이었으며, 셋째로 놀란 점은 전속극단과 전용 소극장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에게도 햇살이 비치기 시작했구나 하는 것이 나의 충격적인 감동이었다. 몸은 군살이 빠져 단단해 보였고, 머리는 새둥지 같은 산발이었으며, 복장은 히피를 뺨칠 정도였으나, 눈동자만은 狂氣에 빛나고 있었다. 그의 첫마디는 "李兄, 아르또를 읽고 있소?"였다. 그의 모습도 아르또와 비슷해서 놀랐지만, 나의 진정한 놀라움은 그가 쓰러지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사실이었다. 그의 집으로 가서 그가 성취한 50여 편의 공연기록 스크랩북을 뒤적이면서 나는 "드디어 해냈구나!"하는 감격의 순간을 되씹고 있었다. 그는 詩를 쓰고 있었다. 그 詩를 그의 공연파트너인 구순이씨(이 극단의 유일한 한국인 여자 연기자이다. 이번 '통·막·살' 공연에 출연하기 위해 韓했다)가 독일어로 번역한다. 그 詩를 옮고 감상하는 명상의 시간으로부터 그의 공연연습은 시작된다. 그 속에는 그가 하고 싶은 말이 담겨져 있다. 그 속에는 그가 전달하고 싶은 채 힘이 담겨져 있다. 그 詩 속에는 그가 전달하고 싶은 정감이 깃들어 있다. 무대의 긴 마루 바닥에 좌선하는 자세로 앉아있는 꽃들은 그의 詩를 통해 무대적 창조의 실마리를 찾는다. 그런 다음 그들은 격렬한 연습의 시간으로 뛰어든다. 무세중씨가 50%를 던지고, 풀가 나머지 50%를 추가해서 한편의 공연이 완성된다. 이같은 集團創作을 하는 과정에서 끊임없는 충돌과 대화와 토론이 벌어진다. 공연장 무대는 긴 구형의 마루바닥이다. 양쪽 끝에 천정까지 와 닿는 커튼이 쳐져 있어 호리존트 구실을 하고 있다. 관객들은 공연장 무대 속 어느 곳에 앉아도 된다. 양쪽 흐리존트에 추상화를 방불케 하는 슬라이드가 비친다. 등신대의 人形이 그 앞에 놓여있다. 배우들은 알몸이 되어 출연한다. 그들의 동작과 춤은 하리만큼 충격적이면서도 무한히 아름답다. 북소리, 징소리, 기타 소리, 강석희의 음악소리, 피에르의 노래소리, 신음소리, 고함소리, 이 모든 소리와 빛과 움직임이 한가지 主題속에 調和를 이루어 관객을 자극시켜 무대속으로 끌어들인다. 소회에 관한 토론을 벌인다. 무세중씨는 民族分斷의 아픔을 그 곳에서도 실감하고 있었다. 그가 소원하는 작업은 과거의 베틀린 역-현재는 역이 된 채 버려져 있는 이 공간에서 통일을 주제로 한 일대 野外 해프닝劇을 시도하는 일이었으며, 故國에 돌아가 똑같은 발상으로 섬진강변에서 統一을 기원하는 살풀이를 한마당 펼쳐보는 일이었다. 이 같은 구상이 변용되어 햇빛을 보게 된 것이 문예회관 소극장에서 금년 2월 10일부터 14일까지 공연된 '友, 그리고 통·막·살 (통일을 위한 막걸리 살풀이, 1982년)이었다.
-
이무성 화백의 춤새(63)<br>무세중 명인의 무사위 춤사위무(巫)사위 우리나라 1세대 전위예술가 무세중 선생이 지역 탈춤을 전수 받고, 탈춤의 기본 동작에 철학적 의미의 '태극'(太極)을 조합시켜 재창작한 춤사위이다. 대학 신입생 20세 무세중은 봉산탈춤(이근성), 양주별산대놀이(김성대), 동래 들놀음(박덕업), 남사당 덧뵈기춤(남형우) 춤사위를 스승에게서 전수 받은 후, 탈춤의 근원을 찾아 또 다시 전국을 누볐다. 1969년 '한국 민속 가면무극 춤사위 종합 전수 발표회'를 가졌다. 이때 발표한 춤사위가 이후 무사위의 근간이 된다. 이후 연극영화과 강의 후 새내기 학생들에게 무사위를 가르쳤다. 민속악회 ‘시나위’ 창립, 민속극회 ‘남사당’ 결성, ‘동아민속예술원’ 창립, ‘극단 민족’ 창립 등 ‘민예부흥운동’의 최 전위에 섰다. 1971년 동아민속 예술원을 설립하고 극단 민족을 창립하여 민속극의 본질 규명을 위한 <마당으로의 환원 작업>의 민예 부흥 운동으로서의 마당극 운동에 앞장서 왔다. 1972년에 민속극회 남사당놀이 여섯 마당을 최초로 무대에 올리는 남사당제(男舍堂祭)를 기획 연출, 3백여 가지의 한국 춤사위를 연구 정리하여 '한국 민속극 춤사위 연구'를 논문으로 발표하였다. "무세중은 태생적으로 굿에 열정을 품은 굿쟁이로 태어나 전위 전사의 무당 칼과 창을 들고 민족 분단의 벽을 치고 민족 분열을 용서치 아니하며 민족의 앞을 지키고자 전위(前衛) 행동의 공연을 끊임없이 저질러 왔다.(중략) 또한 무사위(musawee)라는 무세중만의 독특하고 유일한 춤과 연기 양식의 한극을 만들었으며 그의 춤은 혼을 부르는 춤사위로 영적(靈的) 움직임이 그 좌표가 되며 태극 원리처럼 철학적 상징의 즉흥무로 이어지고 있다."(『무세중의 전위 예술 충돌 50년』서평) 무세중(전위예술가)1937년 서울생. 본명 김세중전위 예술가, 시인, 대동전위극회 대표 사단법인 아리랑연합회 명예 이사장 학력서울고등학교,성균관대학교 불문학과, 중앙대학교 대학원 국문학과/연극학과 졸업드라마 센터 연극 아카데미 (서울예술대학) 졸업베를린 자유대학 (Freie Universität Berlin) 민족학과 수학경력 1971년 극단 <민족>창단 동아민속예술원 원장 1972년 『한국민속극춤사위연구』(김세중, 동아민속예술원) 1973 민속악회 시나위 정기연주회 1975 마당극제 노비 문서 전시회 무세중 창작 발표회 <전통과의 충돌> 1977 한국 전통 택견 발표회 1969-1976년 사단법인 민속극회<남사당> 대표1977년 독일 Berlin극단 대표 1982-2020년 통일아리랑 (통상100여 회 발표) 통막살(통일을 위한 막걸리 살풀이) 발표 1983년 중앙대학교, 한양대학교, 서울예술대학교, 대진대학교/대학원 연극과 출강(1983-2005)(1987-현재)대동전위극회 대표 2011년 제6회아리랑 상 수상 연출가, 안무가, 통일문화연구소 고문
많이본뉴스
많이 본 뉴스
- 1한글서예로 읽는 우리음악 사설(193)<br>강원도아리랑
- 2제6회 시흥갯골국악대제전(06/22)
- 3춘향국악대전 판소리 명창부 대상에 이소영씨
- 4‘2024 광무대 전통상설공연’
- 5국립남도국악원, 불교 의례의 극치 '영산재', 특별공연
- 6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45)<br>한국 최초 '도깨비 학회', 아·태 도깨비 초대하다
- 7제3회 대구풍물큰잔치 ,19일 디아크문화관광장
- 8아리랑 사이트 운영자 정창관 선생 따님 시집 보내는 날
- 9국립극장 마당놀이 10주년…“새로운 얼굴 찾아요”
- 10이무성 화백의 춤새(91)<br> 춤꾼 한지윤의 '전통굿거리춤' 춤사위